유럽 전역에서 진행된 유대인 수난사

아프리카와 유럽 전역에 흩어진 유대인은 중세 전기까지 여러 도시에서 안정적인 생활열 영위합니다. 특히 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유대인들은 상업과 교역활동에 종사하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는데요. 하지만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면성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본격적으로 이뤄집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유대인을 차별하고, 농업 수공업 무역업 등 모든 생업에서 유대인을 배척하면서 유대인은 고리대금업 또는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지만, 일부 유대인은 왕실과 귀족의 집사 역할을 하며 상류 계층으로 활동합니다. 107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유럽 기독교 국가 내 유대인 공직 추방령을 내리자, 이를 계기로 유대인들은 금융업으로 진출합니다.
한편,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거의 없었습니다. 8세기 이후 이베리아반도 절반 정도를 차지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는 재정복운동이 완성된 후 스페인은 유대인 국외 추방령을 선포하는데요. 추방된 유대인을 히브리어로 스페인을 의미하는 세파르디에서 유래한 세파라딤이라고 부릅니다. 세파라딤은 인접한 포르투갈로 이주하고, 이후 포르투갈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행해지자 상대적으로 차별이 약한 신교 국가였던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으로 다시 이주합니다. 특히 암스테르담 일대에 거주한 유대인은 암스테르담을 세계적인 보석 가공 판매 중심 도시로 만들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설립 주역으로 호라동하면서 유립 금융 자본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중세 시절 유대인이 탄압당했던 대표적 사례는 돈을 밝히는 탐욕스러운 이교도라는 사회적 멸시와 거주 지역 분리였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이자 취득은 중요한 죄로 간주됐는데, 유대인이 주로 고리대금업에 종사했기 떄문에 사회적 멸시와 차별 대상이 됐습니다. 셰익스피어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유대인이라는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한 것이죠. 또한 중세 말 유럽 전역에서는 유대인 추방과 함께 게토 정책이 행해지는데요. 게토 정책이란 유대인 거주지를 특정한 곳으로 제한하는 일명 거주지 격리를 말합니다. 게토가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많은 유대인이 동부 유럽과 러시아 등지로 이주합니다. 동부 유럽 국가 중 폴란드는 유대인에게 비교적 관대해 많은 유대인이 바르샤바를 비롯한 폴란드 내 여러 도시로 이주합니다. 폴란드와 독일을 비롯한 동부 유럽 출신 유대인을 히브리어로 독일을 뜻하는 아슈케나지에서 파생된 아슈케나짐이라고 부르는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아슈케나짐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홀로코스트로 큰 희생을 치릅니다.
18세기 시민 혁명을 전후로 서부 유럽국가에서 유대인 차별에 대한 인식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시민 혁명을 통해 봉건적 신분제가 붕괴되고 국민 국가가 등장하면서 유대인을 차별하는 제도들이 폐지되기 때문입니다. 1796년 네덜란드가, 184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가, 1856년 영국이 각각 유대인 해방령을 내립니다. 프랑스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폐지하고 기독교 주민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합니다. 독일에서도 유대인을 유대교로 믿는 독일인으로 간주하고 공동체 일원으로 수용하는 정책을 폅니다. 이런 움직임은 유럽 여러 나라로 확산되고, 19세기 후반까지 유럽 대부분 국가는 유대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폐지합니다. 덕분에 유대인들은 유럽 사회에서 정치계와 경제계로 진출하면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반유대주의의 상징적 사건, 드레퓌스 사건

그런데 역설적으로 19세기 후반 유럽 여러국가에서 반유대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유대인을 국민 국가의 국민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종론적 인식이 확산됐기 떄문입니다. 특히 19세기 말 경제적 불황에 처한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는 빈부 격차 등 사회적 모순을 유대인 탓으로 돌리는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립니다. 러시아와 동부 유럽에서 벌어진 유대인 집단학살을 피해 서부 유럽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이 많아지면서 반유대주의 행태는 더욱 심화됩니다. 이 와중에 1894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은 반유대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드레퓌스 사건이란 유대인 출신 프랑스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간첩혐의로 체포해 종신형을 선고한 사건을 말합니다. 1894년 10월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드레퓌스 대위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제공했다는 간첩 혐의로 체포되는데요. 드레퓌스는 무죄를 주장하지만 12월 군법회의는 종신형을 선고합니다. 이후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군부는 이런 사실을 은폐합니다. 당시 프랑스 지성으로 추앙받던 유명한 소설가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자 로로르 신문 1면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칼럼을 기고하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후에 드레퓌스는 무죄로 석방되지만, 드레퓌스는 당시 프랑스에서 벌어진 반유대주의의 희생자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 특히 유대인 지도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톨레랑스를 최고 가치로 존중하는 프랑스 시민들이 보여 준 반유대주의적 행태에 크게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시오니즘 확산의 촉매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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