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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민주화에서 시작된 시리아 내전, 그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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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7월 바샤르 알아사드가 아버지인 하페즈 알아사드에 이어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2007년엔 재선에 성공합니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취임 초 제한적인 개혁과 개방 정책을 실시하고 정치범 석방 등 민주화 정책도 추진합니다. 이는 일명 '다마스쿠스의 봄'이라고 불렸죠. 하지만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시작한 아랍의 봄 여파는 시리아까지 확산됩니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민주화 운동에서 내전으로 확대된 시리아 사태

SNS와 인터넷을 통해 튀지지와 리비아의 상황이 전해진 시리아에서도 2011년 1월부터 바트당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납니다. 3월 초 요르단 접경과 가까운 남부 지방 다라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낙서를 쓴 중학생들이 체포돼 고문까지 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3월 중순 시리아 여러 도시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납니다. 시위 과정에서 일부 시민이 사망하면서 반정부 시위는 알아사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번집니다. 2012년 6월에는 전면적인 내전으로 확대됩니다.

내전 초기에는 알라위파 정부군과 수니파 반군의 싸움이었지만, 이후 범시아파와 범수니파 간 종파 전쟁으로 확대됩니다. 시리아 정부군과 싸우는 반군 세력은 크게 세 집단이었는데요. 수니파 중심의 자유시리아군(FSA)과 일부 동조 집단, 쿠르드민병대, IS 등입니다. 자유시리아군은 2011년 8월 결성된 시리아국민회의(SNC) 산하에 만들어진 민병대로 연합국 성격이 아닌 독자적인 개별 집단으로 활동하는 느슨한 조직입니다. 쿠르드민병대는 알아사드 정권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시리아 민주연합당(PYD) 산하에 만들어진 무장단체 인민수비대(YPG)와 쿠르드 정당 연합체인 쿠르드국민회의 소속 민병대로 이뤄졌습니다. 인민수비대를 비롯한 쿠르드 민병대는 IS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2012년 시작된 내전이 장기화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범수니파와 범시아파 간 종파전쟁이라는 점입니다. 소수 집단 시아파는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에게 정권을 내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군부를 장악한 알라위파를 비롯한 시아파 세력이 수니파 정권 등장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부족 간 내전 성격이 강했습니다. 또한 미국과 러시아 간 대리적 성격도 있었는데요. 미국은 내전 초 알아사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반 정부 세력 편을 들었지만, IS가 득세하면서 IS 세력 퇴출로 방향을 틀면서 시리아 정부와 어정쩡한 관계가 됐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타르투스 항구에 해군을 주둔시킬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시리아 정부를 지원했습니다.

IS 영토의 변화(2014년~2016년)

시리아 내전이 만들어낸 IS

2014년 6월29일 과격 이슬람 무장 단체는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를 칼리프로 하는 IS를 선포합니다. IS는 시리아에서 6번째로 큰 도시이며 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위치한 락까를 수도로 합니다. 50여년 간 장기 집권한 알아사드 정권을 몰아내려고 시작한 민주화 운동이 아이러니하게도 알아사드 정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단체를 만든 것입니다. IS의 기원은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9년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하자 아프가니스탄에서 살던 이슬람 종파들은 연합해 무자헤딘이라는 저항군을 만들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갑니다. 사우디 출신 오사마 빈라덴과 그의 사상적 멘토였던 압둘라아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빈라덴은 사우디 킹압둘아지즈 왕립대에 재학 중이던 당시 교수였던 압둘라 아잠을 만나고, 그가 주창하는 칼리프 국가 건설 논리에 매료돼 스승으로 모십니다. 두 사람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알카에다를 조직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압둘라 아잠과 빈라덴은 무자헤딘에 참여해 성전을 치를 전사를 양성하는 군사 학교를 반듭니다. 이 병영 캠프에는 1982년 제2차 하마 사태로 쫓겨난 수니파 원리주의자 청년 지하디스트가 대거 입교하는데요. 군사 교육 후 무자헤딘에 참여한 이들을 시리아 지하디라고 부릅니다. 이 과정에서 알카에다라는 비밀 결사 조직이 만들어지고, 빈라덴이 조직의 최고 실력자로 활동하고 압둘라 아잠 또한 사상적 지도자 역할을 합니다. 1989년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자 시리아와 이라크 출신 지하디스트들은 이라크 바그다드로 돌아옵니다.

한편, 요르단 출신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는 다마스쿠스에 칼리프 국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가 만든 조직 구성원 대부분은 이라크 출신이었고, 요르단 국왕을 폐위시키는 것을 1차 목표로 했습니다. 2004년 알자르카위는 조직 명칭을 탄짐 카이다트 알지하드 피 빌라드 아라피다인으로 변경하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실각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주도한 바트당 출신 군인들을 포섭해 조직에 참여시킵니다.

2006년 2월 알자르카위는 동료 알바그다디와 함께 이라크이슬람국가(ISI)를 만듭니다. ISI 단기 목표는 이라크 중부와 서부 지역에 독립된 수니파 이슬람 정통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고, 주요 공격 목표는 미국이 지원하는 이라크 시아파 정부였습니다.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은 공격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ISI를 만든 알자르카위는 2006년 6월 미군 공습으로 사망합니다. ISI가 이라크에서 활동하는 과정인 2012년 시리아에서 내전이 발생하는데요. 시리아 내전으로 ISI 활동 영역은 시리아까지 확대되고 공격 목표에 시리아 알라위파 정부 전복까지 포함됩니다. 이 과정에서 시리아 출신 지하디들이 ISI에 합류하면서 세력이 급속하게 확장됩니다. 그래서 조직명칭도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 이라크-시리아이슬람국가(ISIS)로 불렸습니다.

2014년 6월 ISIL과 ISIS의 명칭은 IS로 통일됩니다. IS의 목표는 샤리아법에 의해 칼리프가 지배하는 정통 이슬람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살라피즘을 주창한 중세 이슬람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 시리아에서 하마 사태를 주도한 모슬렘형제단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공유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길을 잃은 시리아 내전과 향후 시나리오

시리아 내전은 종파 싸움이지만 근본 원인은 세속주의 시리아와 원리주의 시리아 간 신앙적 이념적 싸움입니다. 수니파는 소수 알라위파가 정권을 잡아 취한 일련의 세속화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북동부에 거주하는 쿠르드인은 시리아 내전이 시작되면서 IS 격퇴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알아사드 정권이 실각하면 쿠르드인 자치정부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고 내전에 적극 참여합니다.

시리아 내전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여전히 정부군을 공동의 적으로 하는 세 개 반군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이 내전으로 비화된 2012년에 비해 상황은 많이 단순해졌습니다. 무엇보다 IS는 2017년 이후 활동 근거지의 95%정도를 잃고 세력이 급속히 약화됐는데, 이는 쿠르드인이 일궈 낸 성과입니다. 2017년 9월 알아사드 정권은 러시아 도움을 받아 국토의 90% 정도를 장악합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2011년 이후 2018년까지 시리아에서 발생한 난민은 100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세력이 많이 약화된 IS는 이대로 소멸할 것인지, 아니면 수니파 칼리프 국가를 만들 것인지, 쿠르드인 독립 국가 염원이 이라크가 아닌 시리아 북동부 지방에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인지 등은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시리아 내전은 위치와 지리라는 변할 수 없는 물리적 조건에 종교라는 이데올로기가 깊게 내포돼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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