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 관계 최악으로 만든 베냐민 네타냐후
최근 이스라엘의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가 기사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네타냐후 총리를 필두로 한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게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이-팔 관계가 다시 악화일로를 걷고 있기 때문인데요.
앞서 1월26일 요르단강 서안 북부에 있는 제닌에서 이스라엘군이 수색 작전 도중 팔레스타인 무장세력과 충돌, 민간인과 무장단체 대원 등 9명을 사살했습니다. 이에 이튿날 저녁에는 동예루살렘 북부의 유대 회당에서 팔레스타인 청년이 유대교 신자들을 향해 권총을 난사해 7명이 숨졌습니다. 28일에도 동예루살렘에서 13세 팔레스타인 소년이 총격을 가해 이스라엘인 2명이 다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요르단강 서안 등에서 반이스라엘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스라엘 정부는 규제를 풀어 시민들의 총기 소지를 돕는 한편, 테러범 가족의 사회보장 서비스 및 시민권까지 박탈하는 강경책을 내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강경책을 내놓자 미국까지 개입하고 나섰는데요. 30일(현지시각) 이스라엘을 방문한 토니 블링컨 장관은 네타냐후 총리를 예방햇습니다. 그는 네타냐후 총리 면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모두가 상황을 다시 진정시키고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긴급 조처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역대 이스라엘 최장 임기 총리, 11선 정치인 네타냐후
그렇다면 이런 사태를 촉발한 네타냐후는 누구일까요. 리쿠르당 소속으로 12~24대까지 총 11선을 한 정치인이고, 총리 외에도 국방장관, 외교장관, 보건장관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총리로서는 역대 최장 임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네타냐후는 1949년 10월21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벤치욘 네타냐후를 따라 1963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네타냐후는 그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이스라엘 군에 복무하며 형성했습니다. 그는 형인 '요나탄 네타냐후'와 함께 이스라엘군 정예부대인 사예레트 마트칼에서 복무했는데요. 요나탄은 중령으로 복무하던 도중 1976년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에 납치된 이스라엘인들을 구출하려고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침투한 '엔테베 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했습니다.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네타냐후는 이후 워싱턴 D.C.의 주미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외교관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합니다. 1984~1988년에는 주UN대사를 지냈고, 이후 1988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인으로 재탄생합니다. 정치를 시작한지 8년째인 1996년 그는 리쿠드의 당수로 당선딥니다. 이 당시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서 유화책을 폈던 아라파트와 많은 갈등을 빚었는데요. 이런 와중에 네타냐후는 1999년 총선과 총리 선거에서 모두 대패하며 위기를 맞습니다.
그러나 대반전이 시작됩니다. 2001년 총리 선거에서 리쿠드의 아리엘 샤론이 승리하면서 다시 집권여당 소속 정치인이 된 것인데요, 이후 2003년 총선에서 리쿠드당이 승리하자 외무장관으로 임명되며 부활합니다.
'보수투사'로서의 네타냐후의 면모는 이후 더 두드러집니다. 아리엘 샤론 총리가 온건파로 돌아서며 가자지구 유대인 정착촌 철수 계획을 발표하자 네타냐후는 강경발언을 이어가며 강하게 반대합니다. 자신을 장관으로 임명한 총리와 직을 걸고 다툰 것이지요. 이에 네타냐후는 장관직에서 물러납니다. 이런 갈등 탓에 당은 쪼개지고 마는데요. 샤론이 리쿠드를 탈당하고 중도정당인 카디마당을 새로 창당했고, '꼬마' 리쿠드당을 네타냐후가 이끌지만 2006년 총선에서 12석을 확보하는데 그칩니다.
그러나 또 반전이 일어납니다. 키다미당과 노동당 간의 갈등이 이어지고, 가자지구 봉쇄정책에 대한 국제사회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여기에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가 이스라엘에까지 미친 것인데요. 이에 네타냐후는 강경발언을 이어갔고, 카디마당에 실패한 우파 지지자들은 네타냐후를 지지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2009년 총선에서 27석을 얻은 리쿠드는 우파 연합에 성공해 네타냐후를 총리로 선출합니다. 네타냐후의 두 번째 총리 임기가 시작된 것이죠.
조용할 날이 없어진 이스라엘, 12년 연속 집권
하지만 네타냐후의 이스라엘은 이후 조용할 날이 없어집니다. 계속되는 강경책으로 이-팔 관계는 파탄이 났고, 경기도 나빠져 2011년에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집니다. 2013년 네타냐후는 이스라엘 베이테누와 선거연합을 하고 가자지구 공습을 감행했다가 본래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서 총선에서 패배합니다. 하지만 좌파가 의회에서 의석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네타냐후가 중도파에게 손을 내밀면서 임기를 연장하며 세 번째 총리집권에 성공합니다.
이후에도 네타냐후의 강경책은 게속됩니다. 특히 2014년 말에 팔레스타인 장관이 정착촌 건설에 항의하던 도중에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나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요. 여기에 유대민족법 통과를 하겠다고 밝혀서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이 고조된 가운데서 중도파와의 연정을 깨고 의회해산을 감행하며 2015년 3월 17일에 총선이 치러지게 됐습니다.
선거 초반에 네타냐후가 이끄는 리쿠드당이 승리할 걸로 예측되었지만 선거 중반들어 경제문제가 쟁점이 되자, 네타냐후는 4번째 집권을 위해 미국방문을 추진하였고 2015년 3월 3일에는 미국상원에서 연설을 했는데 주 내용은 북한의 핵을 비교하며 이란의 핵개발에 대한 미국의 대처와 이에 따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용 탓에 연설 당시 민주당은 불참했고 공화당만 참가했죠. 그러나 이런 행보에도 결국 2015년 총선에서 우파 연합은 선전했고, 4선에 성공했습니다.
12년 집권의 마무리, 그러나 1년 만에 복귀한 총리 네타냐후
이런 그는 2021년 12년만에 집권을 마무리하고 총리직에서 내려옵니다. 2021년 3월 23일 열린 4차 총선 출구조사에서 네타냐후가 이끄는 리쿠드가 31~53석, TV 앵커 출신 야이르 라피드가 이끄는 중도 성향 예쉬 아티드가 16~18석을 각각 획득한 것으로 발표됐으며 리쿠드당 주도 우파 블록이 53~54석, 예시 아티드 주도 반 네타냐후 블록이 59석을 확보해 양쪽 모두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기 때문인데요. 야이르 라피드 예쉬 아티드 대표가 반네타냐후 8개 정당 연정구성에 성공하면서 네타냐후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네타냐후는 이렇게 정계에서 물러나는 듯 했으나, 지난해 11월1일 열린 조기 총선에서 네타냐후가 이끄는 우파 블록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면서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특히 극우 성향 종교 시온주의당이 의석을 대거 늘려서 이번 이-팔 관계 악화 사태의 주요 원인이 됐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네타냐후 내각은 국가안보 장관이 팔레스타인의 반발을 무릅쓰고 동예루살렘 성지 방문을 강행하는 등의 행보를 이어갑니다.
네타냐후의 경우 중동에서 그나마 돌아가던 몇 안되는 민주주의 제도를 파괴하고 아랍 세계와의 전쟁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는 초강경 외교 행보로 인해 국내외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네타냐후는 이제는 민주주의의 핵심중의 핵심인 삼권분립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의회에서의 야당의 견제를 무력화하려고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교분리 원칙도 무시하고 유대교 랍비들의 의사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로 변모시켰다고 비판을 받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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