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피해에 발벗고 나선 한국 "튀르키예는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 6.25 참전이 계기
윤석열 대통령은 9일 튀르키예 대사관을 방문해 대지진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형제의 나라'라고 일컬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튀르키예 국민들이 좌절과 슬픔을 딛고 일어나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면서 "대한민국은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 국민들이 용기와 희망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함께 하겠다"고 방명록에 썼죠. 앞서 8일 박진 외교부 장관과 전화통화를 가진 메블륫 차부쉬오울루 튀르키예 외교장관은 '형제의 나라'인 한국에서 튀르키예 국민들에게 위로를 표하고 피해 복구를 적극 지원해 주고 있는 데 대해 사의를 표하고, 한국 국민들의 위로와 지원에도 감사를 전했는데요. 이처럼 양국은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고 칭하면서 깊은 유대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튀르키예와 한국은 왜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시간은 6.25 전쟁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튀르키예는 6.25 전쟁 당시 군인 1만4936명을 파병해 유엔군 파병규모 4위를 기록했습니다. 튀르키예가 6.25 전쟁에 많은 군사를 파병한 것은 특히 반소련 감정이 컸기 때문도 있는데요. 튀르키에는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러시아와 자주 전쟁을 치른 탓에 당시 소련에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탈냉전 이후 관계가 개선된 것과는 다른 모습이죠.
어찌됐든 튀르키예는 상당한 군사를 보내며 한국인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줬습니다. 튀르키예가 치른 전투 중 유명한 일화가 바로 '김량장 및 151고지 전투'인데요. 이 전투는 튀르키예 여단이 중공군 제50군 예하 제149사단 제447연대 및 150사단 제448연대와 치른 전투입니다. 튀르키예 여단은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를 평택-제천선에서 저지하고 재반격 작전을 실시할 때, 안성-송전선에 전개해 1월25일부터 김량장(현 경기도 용인시) 및 151고지를 목표로 공격을 실시했는데요.
당시 중공군도 그 선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해 결전을 시도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격전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이 때 튀르키예 여단은 각종 지원화력과 근접 항공지원을 요청해 중공군의 진지를 타격한 후, 알라를 찬송하는 '알라 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돌격을 실시해 김량장과 그 서쪽 151고지를 백병전으로 점령하고 중공군을 격퇴했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 튀르키예군은 총검에 의한 백병전으로 병사 1명당 40명의 적을 무찔러 '백병전의 튀르키예군'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습니다. 3일간의 전투에서 확인한 중공군의 시체가 474명인데 전사자의 대부분이 개머리판에 의해 턱이 깨지고 총검에 찔린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튀르키예군인 151고지에서 압승한 30분간의 백병전 상황은 UPI 기자에 의해 전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 전투는 군우리 전투에서 패배한 튀르키예군의 명예를 회복한 전투였습니다.
2002 월드컵으로 감동받은 튀르키예 사람들
한국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군들도 한국에 대한 기억이 좋습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은 '신앙의 수호자'라는 뜻인 가지(Gazi) 칭호가 붙어서 코레 가지(Kore gazi)라고 칭하며, 자기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코레 가지라며 환대해 주는 모습도 아직 쉽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성을 한국인(koreli)으로 바꾼 사람도 있을 정도죠. 저쟁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 후 튀르키예를 최우선 수교대상국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1957년 수교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관련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튀르키예인은 스스로를 '튀르크'라고 부릅니다. 튀르크는 한자 가차로 쓰면 돌궐이죠. 돌궐은 북주 북제 중국을 속국으로 삼고 오래 군림했으며 돌궐과 고구려는 동맹을 맺은 역사가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는 돌궐의 군사 원조를 많이 받은 기억이 있기도 합니다. 연개소문과의 관련 그리고 귈테긴 비석에서는 고구려와의 형제 동맹의 기록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최초 투르크계인 흉노와 한민족의 고조선은 강력한 동맹이였고 교류가 많았습니다. 한민족은 신라와 가야에서 보여지는 왕의 호칭인 간을 투르크계보다 먼저인 B.C.69년부터 썼으며 투르크어로도 왕은 "한" "칸" 이라고 부릅니다. 과거부터 튀르키예와 한국은 그 관계를 이어온 셈입니다.
2000년대 이후에도 양국은 서로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습니다. 대표적인게 2002 월드컵이죠. 당시 튀르키예가 48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해서 월드컵 3위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두어서 튀르키예 내에서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상태였는데, 그 와중에 한국 사람들이 튀르키예를 형제의 나라라며 추켜세워 준 것인데요. 경기 때 응원도 많이 해 준다라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한국에 대한 호감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튀르키예가 한국 전쟁때 많이 도와줬고 여러가지로 우리 형제의 나라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서 '터키(튀르키예)를 응원해 줍시다' 라는 분위기가 퍼졌고, 일반 관중들이 다른 나라 경기는 그냥 반반 나눠서 응원을 하기도 했고, 인기팀만 일방적으로 응원하던 일본 관중들과 달리 한국의 일반 관중들은 약자팀에 응원을 보내는 성향이 많았던 점이 작용해서 튀르키예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 하이라이트는 단연 3, 4위전에서 대형 태극기와 함께 대형 월성기(Ay yıldız, 아이 이을드즈)가 펼쳐진 것인데요. 그 중 하이라이트는 단연 3, 4위전에서 대형 태극기와 함께 대형 월성기(Ay yıldız, 아이 이을드즈)가 펼쳐진 것 합니다. 그 중 하이라이트는 단연 3, 4위전에서 대형 태극기와 함께 대형 월성기(Ay yıldız, 아이 이을드즈)가 펼쳐진 것였다고 하는데요. 이를 계기로 한국과 튀르키예 간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2002년 월드컵 3, 4위전 당시 튀르키예에 여행등으로 체류 중인 한국인들에게 호텔, 민박과 같은 숙박업소에서는 숙박비를 받지 않았고 식당에서는 식사비를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죠.
튀르키예에 있는 한국 공원, 서울의 앙카라 공원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때는 한국에 거주하던 튀르키예인 4명이 "형제의 나라"로서 모른 척할 수 없다며 희생자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 자원봉사자들에 케밥을 무료로 제공하는 훈훈한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친선의 흔적들도 있습니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앙카라 공원이 있는데 공원이름이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 시에서 본땄다고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가 튀르키예 앙카라 시와 함께 양국 수도끼리 자매결연을 맺고 있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도 한국 공원(Kore parkı)가 있습니다. 울루스역에서 바흐첼리에빌레르로 가는 돌무쉬를 타고 5분쯤 가면 보이는데, 건너편에 아타튀르크 문화센터가 있고, 공원에는 석가탑을 본뜬 조형물과 박정희 정권 시절에 세운 기념비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도 한국 공원(Kore parkı)가 있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 중 하나인 갈라타 타워 앞에 2013년 경주 - 이스탄불 엑스포 개최를 기념해서 한국과 튀르키예 간의 우호 기념비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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