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에 성공한 동티모르
인도네시아는 여러 섬으로 구성된 나라이기 떄문에 그만큼 분쟁지역도 많습니다. 우선 분리독립에 성공한 동티모르를 살펴보겠습니다. 티모르 섬은 소순다 열도 동쪽 끝에 위치합니다. 전체 면적은 약 3만3900제곱킬로미터로 우리나라의 1분의3 정도 크기입니다. 티모르의 서쪽은 인도네시아령이고, 동쪽은 2002년 독립한 동티모르로 우리나라 경상북도 면적과 비슷합니다. 티모르섬에는 향신료 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특히 고급 가구 제작용 목재로 알려진 흑단, 자단 등 향나무가 많이 분포합니다. 섬의 동부와 서부는 종교 문화적으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서부는 이슬람교를 주로 믿고, 동부는 포르투갈 영향으로 대부분 가톨릭교를 믿습니다.
1505년경 티모르섬에 포르투갈이 들어오고, 1520년경 스페인도 들어옵니다. 1613년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이 차지한 동티모르가 아닌 반대쪽 서티모르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서쪽은 네덜란드령으로 양분되고, 이후 네덜란드는 동티모르를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으려는 시도를 1859년까지 지속합니다. 하지만 동티모르를 차지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양국 간 협상에 의해 현재 국경이 만들어졌습니다. 동티모르는 포르투갈 마카오 총독의 관리를 받고, 1926년 포르투갈 독립 해외 식민지로 지위가 바뀝니다. 1945 이후 인도네시아가 독립하면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서티모르가 인도네시아 영토로 자연스럽게 합병된 반면,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이 계속 지배합니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동티모르 내에서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포르투갈과 느슨한 연계를 유지하자는 티모르민주동맹과 완전한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 간 내전이 1975년 8월 발생합니다. 내전은 프레틸린 승리로 끝나고, 11월 프레틸린은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합니다.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은 하나의 인도네시아를 주장하며 동티모르를 강제로 합병시키고, 1976년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 17번째 주로 편입합니다.
1980년 이후 프레틸린이 주축이 돼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게릴라전을 펼칩니다. 1991년 11월 동티모르 수도 달리에서 벌어진 일명 산타크루즈 대학살은 동티모르 독립 운동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합니다. 그해 10월 말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청년 고메즈가 인도네시아 무장 군인과 경찰의 총격을 맞고 사망하자 11월12일 고메지 추모 미사를 마친 참석자들이 산타크루즈 묘지로 행진하는 중 경찰과 충돌해 약 2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이 사태를 계기로 독립 운동 세력들은 단일 대오를 구축해 체계적인 독립 운동을 펼칩니다. 동티모르 독립운동은 UN 지지를 받게되고, 1999년 9월 UN 중재로 독립파와 자치파 간 협상을 통해 국민투표고 이뤄지고 분리 독립이 결정됩니다.
2002년 5월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고,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알려진 사나나 구스마오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제2대 대통령으로 199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조제 하무스 오르타가 취임합니다. 이후 대통령 선거를 놓고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좌익 프레틸린과 동티모르국가재건회의를 비롯한 나머지 정파 간 세력 다툼으로 내부 갈등은 계속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자바문화를 거부하는 아체의 분리 독립 운동
수마트라섬 서북부 끝단에 위치한 아체 지역은 인도네시아 특별 행정 구역입니다. 면적은 약 6만세제곱킬로미터로, 수마트라 전체 면적의 12% 정도를 차지합니다. 주도는 반다아체입니다. 믈라카 해협 입구에 위치한 아체는 예로부터 아라비아와 인도 상인이 많이 방문한 후추와 향신료 집산지였고, 11세기 후반에는 이슬람교도 상인들이 이슬람을 전파한 곳입니다.
아체는 종족-역사-문화가 자바 중심인 인도네시아와 크게 다른데요. 아체 지역 인구 70%는 아체족이 차지하고, 자바족(9%), 가야족(7%), 바탁족(3%) 등 10개 종족이 거주합니다. 17~18세기에는 인접한 말레이반도 믈라카와 함께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계 거점으로 성장했습니다. 1496년부터 1903년까지 존속된 아체 술탄 왕국은 종교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외부 세력에 강경한 태도를 취합니다. 1599년 9월 네덜란드 향신료 루트를 개척한 하우트만이 당시 아체 술탄 왕국의 여자 제독이었던 말라하야티가 이끈 이농 발리 부대와 싸우다 전사한 곳이 아체입니다. 아체인들은 1873년부터 1914년까지 당시 네덜란드 식민 통치를 거부하며 일명 아체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이후, 아체는 인도네시아 정부를 상대로 분리 독립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아체는 자바가 아니다라는 지역적 고유성과 차별성을 부각하면서 분리주의 운동을 전개한 것인데요. 중앙정부도 아체가 지닌 지정학적-경제학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1959년 이후 특별 자치 행정구역으로 지정합니다. 하지만 아체 지역이 인도네시아 천연가스의 30% 석유의 20% 정도를 생산하는 자원의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아체의 지역 발전을 위한 투자에 소극적이라는 불만이 팽배했고, 1976년경 분리독립 운동을 위한 자유아체운동을 만들어 반정부 활동을 벌입니다. 2002년 동티모르가 분리독립에 성공하면서 아체 분리주의 운동은 탄력을 받지만, 2004년 발생한 대형 쓰나미 사태로 자유아체운동이 무장 해제와 평화 협정 체결에 합의하면서 30여년 지속된 대립구도는 일단락됩니다. 중앙정부는 아체에 보다 많은 자치권을 허용하고 있지만, 아체의 분리주의 운동은 소멸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파푸아로 개명된 이리안자야의 분리 독립 운동
이리안자야는 뉴기니섬 서쪽 절반을 지칭합니다. 2002년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리안자야 공식 명칭을 파푸아로 변경합니다. 파푸아 면적은 42만2170제곱킬로미터이고, 행정 구역은 파푸아주와 서파푸아주 두 개로 구성되며, 주류 종족은 파푸아족입니다. 파푸아가 위치한 뉴기니섬은 그린란드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섬입니다. 뉴기니라는 지명은 16세기 중반 스페인 선원들이 아프리카 서남부에 위치한 기니 주민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인것이라고 합니다. 네덜란드 지배 시절에는 더치 뉴기니, 서이리안 등으로 불렸습니다. 섬의 동부는 1975년 영국에서 독립한 파푸아뉴기니입니다.
1511년 포르투갈인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뉴기니섬을 항해하지만, 섬에는 상륙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스페인 상인들이 섬 주변을 탐험하고, 1660년 이후 네덜란드가 뉴기니섬을 관할하는 티도레 술탄국 주권을 인정하며, 네덜란드 영향권 내로 편입시킵니다. 1793년 영국이 이리안자야 북부 마노콰리에 들어오면서 티모르섬에 대한 관할권을 놓고 다투고, 영국과 네덜란드는 1824년 영토 협정을 맺어 네덜란드가 섬의 서쪽을 자국 식민지로 설정합니다. 독일도 1828년 섬의 북동부 포트 두 버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합니다. 1905년 영국은 자국 식민지였던 뉴기니섬 동부를 파푸아로 명명하고, 관리권을 호주에 넘깁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호주 군대는 독일이 주장하는 북동부 지역을 점령하고 1920년대에는 섬 동쪽 영역을 호주가 관장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일본이 1942년 섬을 점령합니다. 1961년 이리안자야가 독립을 선언하자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인도네시아도 반대합니다. 1962년 이리안자야를 놓고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가 충돌하지만 1963년 인도네시아가 영토로 합병하고, 1969년 공식 영토로 선언합니다.
인도네시아로 합병된 이후, 이리안자야 주민들은 자유파푸아운동이란 조직을 만들어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중앙 정부가 이리안자야 분리 독립 요구를 무력으로 탄압하면서 독립 투쟁은 주춤하지만, 1975년 파푸아뉴기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분리 독립 운동은 재개됩니다. 2000년 인도네시아 정부는 1969년 해산시킨 이리안자야 의회를 복원시켜 주면서 유화책을 펼칩니다. 하지만 이리안자야 의회는 2000년 6월 3일에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는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자유파푸아운동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제시한 특별 자치주 제안을 전면 거부하고 군과 경찰은 물론 이들을 지원하는 모든 민간인들을 응징하겠다고 천명하면서 무력 충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의 분쟁지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분리 운동의 역사 (1) | 2023.03.10 |
---|---|
출구가 보이지 않는 카슈미르 분쟁 정리 (0) | 2023.03.09 |
소련 아프가니스탄 침공, 탈레반의 복귀 (0) | 2023.02.15 |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와 복잡한 종족 구성 (0) | 2023.02.14 |
남북 예멘 통일과 후티 반군의 등장 (0) | 2023.02.13 |